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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0. 10世 〉13. <요재공>순창조씨세거비(淳昌趙氏世居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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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부정공>통훈대부태인현감공휘대승묘갈명(通訓大夫泰仁縣監公諱大承墓碣銘)
通訓大夫泰仁縣監公諱大承墓碣銘 順天郡住岩面飛龍村後鵲峯下負艮原即通訓大夫泰仁縣監趙公諱大承藏也後三百餘年壬戌秋後裔昌周洪根炳箕等使炳寬千里請余銘將以勒石樹阡按公字克紹玉川人高麗檢校侍中璋爲鼻祖三葉有諱元吉典工判書封玉川君諡忠獻子瑜進文至副正事親孝行三年喪當鼎革杜門罔僕世宗旌其忠孝章甫爼豆之孫智崑官井邑縣監輿地勝覽載其治績四昆季友愛築相好亭湛樂其中即公曾祖諱和忠武衛副司直諱介臣司憲府監察寔祖禰兩世妣宜人昌原丁氏漢之女公旬幼事親孝生死葬祭一遵禮制處弟妹盡其歡治性又好學三灘大春梅窓大成三從昆季皆一門善士許江湖淹鄭圃堂思翊皆同鄉重望也而公與資麗澤金甑山鸞祥白休菴仁傑又以材器需世許之明廟壬戌司憲府監察乙丑泰仁縣監法陳古靈仙居之治敎以八條曰愛君愛父宜家保族悌長善交務讀務耕鄉俗賴以丕變又兼本縣講學堂訓導訓鄉子弟正其趨向吏民相和而歌曰昔有陳古靈善諭仙居俗今有趙明府善化吾鄉俗居三年丁卯 明廟棄臣民公解紱歸田壁上書桐江明月栗里淸風八字以示其意及龍蛇兵興二甥許鏡許銓兄弟起義旅赴鬪公傾家餉軍送從姪瑋扈駕龍灣錄宣武二等勳公所以密伸者如此生年月日無傳忌甲辰二月十九日配令人朔寧崔氏參奉康濟女墓用魯衛禮一男珏訓鍊奉事有孝行進士金潗金弘毅二女婿孫義吉通德郎金光述張元俊時耈時鼎維春維夏維憲維城曾玄孫銘曰南陔白華大本既立埍箎迭吹朝益暮習斯又取斯魯多君子甑老休翁是知德者牛刀割鷄薄試南州仙居之治歲僅再周中途泣弓歸去來辭桐江栗里風月襟期國歩百六猖獗島夷志切敵愾恨身己衰二甥赴難糧饋千里執靮龍灣有是猶子迹晦林樊義薄雲天受天之祐令終餘年鵲峯嵯峨萬古幽宅紀實詔後有碣三尺 德水 李商永 撰 敎授官滄上 통훈대부태인현감공휘대승묘갈명(通訓大夫泰仁縣監公諱大承墓碣銘) 순천군 주암면 비룡촌(飛龍村)뒤 까치봉 아래 간좌(艮坐) 언덕은 바로 통훈대부 행태인현감(行泰仁縣監) 조공 휘대승(大承)의 무덤이다. 三백여년 후인 임술년 가을 후손 창주(昌周)·홍근(洪根)·병기(炳箕) 등이 병관(炳寬)을 천리 먼 곳에 보내 나에게 묘비명을 청하여 장차 비석을 세우려 한다. 상고하건대 공의 자는 극소(克紹)로 옥천인인데 고려 검교시중(檢校侍中) 장(璋)을 시조로 한다. 그 증손인 휘 원길은 전공판서 옥천군으로 시호는 충헌이며 아들 유는 문과로 벼슬이 부정에 이르렀는데 어버이를 효도로 섬기고 삼년상을 치르었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서 절의를 지켰는데 세종께서 그의 충효를 정려(旌閭)하여 선비들이 제사한다. 손자 지곤(智崑)은 벼슬이 정읍현감이었는데 그 치적(治績)이 여지승람(輿地勝覽)에 기록되어 있다. 네 형제가 우애하면서 상호정을 지어 그 곳에서 함께 즐기었으니 바로 공의 증조이다. 휘 화(和)는 충무위 부사직(忠武衛副司直)이요 휘 개신(介臣)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이니 이 분들이 공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이다. 비(妣) 의인(宜人) 창원 정씨(昌原丁氏)는 한지漢之)의 따님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효도로 부모를 섬겨 생(生) 사(死) 장(葬) 제(祭)에 한결같이 예제를 따랐다. 동생과 누이를 대할 때는 기쁨을 다 하였고 성품이 학문을 좋아하여 삼탄(三灘) 대춘(大春)과 매창(梅窓) 대성(大成) 등 삼종(三從)형제가 모두 한 집안의 훌륭한 선비였다. 강호(江湖) 허엄(許淹), 포당(圃堂) 정사익(鄭思翊)은 모두 동향의 친구로 중망(重望)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공은 자질이 특히 뛰어났다. 증산(甑山) 김난상(金鸞祥), 휴암(休菴) 백인걸(白仁傑)과는 또 재기(材器)로 허락하였다. 명종(明宗) 임술년(一五六二)에 사헌부 감찰을 지냈고 을축년에는 태인현감이 되어 진고령(陳古靈)의 선거령(仙居令)시절 법도를 본받아 여덟 가지 조목을 가르쳤다. 첫째 어버이를 사랑하고, 둘째 가족을 부양하며, 세째 어른을 공경하고 친구와 잘 사귀며, 네째 공부와 농사에 힘쓰라는 등의 것이었는데 이를 힘입어 그곳 풍속이 게 변하였다. 또 현의 강학당(講學堂) 훈도(訓導)를 겸하여 고을의 자제를 훈도하고 아전과 백성들이 나아갈 바를 알게 하였다. 그래서 백성들이 서로 노래하기를, 옛날에 진 고령은 昔有陳古靈 선거땅 풍속을 잘 고쳤는데 善諭仙居俗 이제 조씨 원님은 今有趙明府 우리 고장 풍속 교화했네. 善化吾鄉俗 하였다. 三년동안 있다가 정묘년 명종(明宗)이 승하하자 공은 벼슬을 버리고 농촌으로 돌아가 벽에다 동강의 명월이요 율리의 청풍이네(桐江明月 栗里淸風)이랑 여덟 자를 써 걸어 자신의 뜻을 보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두 생질인 허경(許鏡)·허전(許銓) 형제를 의병(義兵)이 되어 나가 싸우게 하고 공은 집안 재산을 털어 의병의 군량을 대었다. 그리고는 조카 위(瑋)를 보내 의주(義州)로 파천하는 임금을 호위하게 하여 선무공신(宣武功臣) 이등훈(二等勳)에 기록되었으니, 공이 몰래 뜻을 편 것이 이와 같았다. 생년월일은 전하지 않으며 갑진년(一六○四) 二월十九일 제삿날이다. 배(配) 영인(令人) 삭녕최씨(朔寧崔氏)는 참봉 강제(康濟)의 따님으로 묘는 부장(祔葬)하였다. 아들 각(珏)은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인데 효행(孝行)이 있었고 두 딸은 진사 김집(金潗)과 김홍의(金弘毅)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의길(義吉)은 통덕랑이며 손녀 사위는 김광술(金光述)·장원준(張元俊)이며, 시구(時耈)·시정(時鼎)·유춘(維春)·유하(維夏)·유헌(維憲)·유성(維城)은 증손자와 현손(玄孫)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남쪽 고을 백화에 南陔白華 큰 근본 이미 세웠네. 大本既立 훈지 번갈아 불며 埍箎迭吹 아침저녁으로 학문 닦았네. 朝益暮習 여기에서 모두 취하니 斯又取斯 노나라의 군자 많았네. 魯多君子 김 증산과 백 휴암은 甑老休翁 덕이 있는 분이었네. 是知德者 큰 그릇으로 작은 고을 원님되어 牛刀割鷄 남쪽 태인 고을 다스려서 薄試南州 선거의 훌륭한 정치 이루었네. 仙居之治 겨우 두해 남짓 歲僅再周 중도에 명종이 빈천하니 中途泣弓 귀거래사 읊었네. 歸去來辭 동강과 율리의 桐江栗里 풍월과 금도이네. 風月襟期 나라가 위태로와 國步百六 왜구(倭寇)가 창궐하니 猖獗島夷 나라 위한 뜻 간절하나 志切敵愾 몸 늙은 것 한스러워 恨身己衰 두 생질 싸움터에 보내고 二甥赴難 천리의 군사 먹였네 糧饋千里 의주로 몽진하는 임금 호종한 執靮龍灣 훌륭한 조카 있었다. 有是猶子 자취를 산림속에 감추었으나 迹晦林樊 의기는 하늘 높이 뻗혔네 義薄雲天 하늘의 도움받아 受天之祐 남은 여생 잘 마치니 令終餘年 높고 높은 까치봉이 鵲峯嵯峨 만고의 유탁이네. 萬古幽宅 사실을 새겨 후세에 알리는 紀實詔後 세 자 비석 세우네. 有碣三尺 덕수(德水) 이상영(李商永) 지음 註:※율리(栗里):도연명(陶淵明)의 고향을 말함. ※이상영(李商永):본관은 덕수(德水) 호는 창상(滄上)으로 교수관(敎授官)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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